2012년 01월 09일
도덕적 공분과 윤리적 각성
아주 오랜만에 올리는 글. 요즘 생각하는 주제 중 하나인 도적적 공분과 윤리적 각성에 대해 쓰여진 글이라, 반가운 마음에 그 일부를 올린다. 전문은 한겨레 21의 <부조리한 현실에 쫄지 마: 2012.01.09. 893호>(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153.html)로, 영화평론가 김영진이 생각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취해야 할 윤리에 대한 내용이다.
최근의 정의 놀이를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볼 때, 나는 혹은 우리는 도덕적 공분을 통해 자기만족을 얻거나 자신의 타당성를 확보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진실로 우리는 부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각성과 분노의 결정적 차이
<도가니>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학생들의 현실에 분노하는 강인호(공유)와 서유진(정유미)의 태도는 시종일관 강조되는 영화 속 소년·소녀들을 보는 관객인 우리의 시점과 겹쳐진다. 부도덕한 현실과 그 희생자들을 보며 분노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다.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견디는 것은 그와 달리 쉽지 않다. 고통에의 동참은 시각적 경험의 나눔을 통해 힘겹게 이뤄진다. 본다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이 경우에는 불쾌이며 나아가 고통이다. 정의를 지향하는 강인호의 캐릭터는 우리의 윤리적 각성과 고통에 자그마한 탈출구를 마련해준다. 대중영화로서 이런 장치는 그 자체로 비난받을 것이 못 된다. 그렇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법정의 정당한 판결을 받지 못한 채 분노한 한 등장인물이 합의로 풀려난 가해자를 찾아가는 대목은 더 큰 윤리적 간극을 발생시킨다. 이 대목에 이르러 관객의 도덕적 공분은 더욱 고조된다. 이 도덕적 공분과 윤리적 각성은 좀 다르다. 도덕적 공분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우월한 판관의 위치를 확인시키지만 윤리적 각성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회의를 증식시킨다.
예술가의 필터에 잡힌 ‘진실’
우리가 실화에 기초한 영화에서 원하는 것은 진실인가, 감동인가. 그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이라는 것이 우리가 뭔가를 알아냈다고 하는 지식의 획득에서 오는 안도감과 주인공들 편을 들어줬다고 하는 도덕적 우월감에 기초한 감정의 단순 조건반사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건 영화로 보는 또 하나의 감정소비 패턴인가, 아니면 고통과 쾌락을 동반하는 참여에의 경험인가.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은 카프카의 소설이 나온 이래 현실에 묻은 진실을 온전히 다 파악할 수 없다고 하는, 작품은 예술가의 주관적 필터에 잡힌 진실의 한 조각이라고 하는 명제를 미학화했다.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현실 앞에서 회의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진다면 사회는 그만큼 성숙해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날로 팍팍해지고 부조리해지는 우리 현실이다. 영화는 진실도 담아야 하고 위로도 해줘야 한다. 그 균형감의 경계를 어떻게 정할지에 관해 적어도 최근 한국 영화들은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부러진 화살>의 결말은 현실에서와 같이 주인공의 패소로 끝난다. 그런데도 화면은 경쾌하다. 여전히 권력에 항의하고 맞서는 주인공을 보여주며 끝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위풍당당한 주인공을 통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요즘 유행하는 <나꼼수>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러니까 ‘쫄지 마’.
# by | 2012/01/09 15:46 | 트랙백 | 덧글(0)




